1. 도입
법학을 공부하다 보면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경우와 善意의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경우가 헛갈리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 제한과 상법상 대표이사의 대표권 제한도 그런 예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민법 제60조(이사의 대표권에 대한 제한의 대항요건) 이사의 대표권에 대한 제한은 등기하지 아니하면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상법 제209조(대표사원의 권한) 제1항 회사를 대표하는 사원은 회사의 영업에 관하여 재판상 또는 재판외의 모든 행위를 할 권한이 있다.
제2항 전항의 권한에 대한 제한은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합명회사에 관한 상법 제209조를 주식회사의 대표이사에 관한 상법 제389조 제3항에서 준용하고 있으므로 주식회사 대표이사의 대표권 제한도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합니다.
2. 상법상 대표권의 포괄성·정형성·획일성 vs. 민법상 대표권의 비정형성
상법상 대표이사의 대표권은 포괄성을 가집니다. 위 상법 제209조 제1항이 포괄성을 규정한 조항이죠. 한편 정형성이 있습니다. 이 정형성을 이해하는 것이 왜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 제한의 대항력과 상법상 대표이사의 대표권 제한의 대항력을 다르게 정하였는지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상법상 대표권의 정형성이란, 대표권의 내용이 법에 의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회사마다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방금 위에서 본 것처럼 재판상 또는 재판외의 모든 행위를 할 권한이 있습니다. 회사의 영업의 전부 또는 중요한 일부의 양도를 하거나, 영업전부를 임대 또는 경영위임하는 경우, 회사를 합병·분할하는 경우 등에는 대표이사의 대표권 행사는 주주총회의 특별결의를 얻어야 합니다(상법 제374조, 제522조, 제530조의3). 하지만 법률에 의해 일률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정형적입니다.
대표이사의 대표권은 처음부터 그러한 내용으로 정해진 것이지요. 흔히 법률의 규정에 의한 대표권 제한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정형성의 관점에서 엄밀히는 대표이사의 대표권은 처음부터 그 내용이었던 것이지 새롭게 제한된 것은 아닙니다.
반면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은 그런 의미의 정형성이 없습니다. 민법상 법인마다 이사의 대표권은 다 다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민법 제59조(이사의 대표권) 제1항 이사는 법인의 사무에 관하여 각자 법인을 대표한다. 그러나 정관에 규정한 취지에 위반할 수 없고 특히 사단법인은 총회의 의결에 의하여야 한다.
흔히 민법상 이사도 상법상 대표이사처럼 재판상 또는 재판외의 모든 행위를 할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그 대표권을 정관 등에 의해 제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에서 보는 유력한 학설도 그렇게 전제합니다. 사실 포괄성을 인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1
그러나 민법은 이사의 대표권에 관해 상법 제209조 제1항과 같은 취지의 조항을 두지 않았습니다. 민법 제59조 제1항 본문은 상법 제207조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만으로 주식회사의 대표이사가 재판상 또는 재판외의 모든 행위를 포괄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상법 제209조 제1항과 같은 규정을 둘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요컨대 민법 제59조 제1항 본문은 이사가 회사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 뿐이고, 이사의 대표권한의 내용·범위에 대하여는 정한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같은 항 단서에서 보듯이 '정관에 규정한 취지'와 사단법인의 경우 '사원총회의 의결'로 정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은 민법상 법인마다 다른다는 점을 전제로 이해해야 합니다.
3.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 제한에 관한 학설
민법 제60조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의 해석에 관해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견해와 "악의의 제3자에게도 대항할 수 있다는 견해"가 대립합니다.
위와 같이 등기하지 않으면 대항력이 없고, 민법 제40조의 정관에 기재하지 아니하면 효력이 없는 '이사의 대표권 제한'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대표권의 제한을 대내적 제한과 대외적 제한으로 구분하는 전제에서 대표권의 유무, 공동대표 등과 같이 대표의 방식을 정한 경우가 대외적 효력 있는 제한이라고 하는 견해와 '대표권의 범위, 사원총회 결의 등 행사요건을 정한 경우도 포함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2
4. 무엇이 이사의 대표권 제한인가?
먼저 정관이나 사원총회 결의에서 이사의 대표권에 대해 정하지 않았으면 이사는 어떤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 말한 분위기로 보아 모든 행위를 다 할 수 있다는 아니겠죠.
민법 제59조 제2항을 볼까요.
제59조(이사의 대표권) 제2항 법인의 대표에 관하여는 대리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이 조항을 대표와 대리의 유사성에 비추어 그냥 적어 놓은 것이라고 큰 의미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사의 대표권을 제목으로 한 조문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민법 제118조에서 권한을 정하지 아니한 대리인은 1. 보존행위, 2.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그 이용 또는 개량하는 행위만을 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권한을 정하지 않은 대표자인 이사가 할 수 있는 행위도 이에 준한다고 해석함이 자연스럽겠지요. 그렇다면 적어도 법인의 존속을 전제로 하지 않는 행위는 물론이고 통상의 사무를 벗어나 법인의 現狀을 변경하는 행위는 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정관이나 사원총회 결의에서 이사의 대표권의 범위를 정한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어 '10억 원 이상의 어음행위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할 수 없는 행위들을 정할 수도 있고, '시설 운영에 관한 재판외의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정할 수도 있을 겁니다.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의 비정형성이란 관점에서 소극적으로 정하였다고 바로 대표권을 제한한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대표권의 제한이라고 하려면 제한되지 않은 상태의 대표권의 범위는 무엇인가를 먼저 확정해야 합니다. 상법상 지배권·대표권은 포괄성이 있으므로 법령과 다르게 정하면 그것이 곧 지배권·대표권의 제한이 됩니다. 명문의 정함이 없는 한, 정관으로 법령으로 정해진 범위 이상으로 지배권·대표권을 부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제한만이 문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은 그러한 포괄성이 없습니다. 대신 민법은 권한을 정하지 않은 경우의 대표권의 범위만을 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 제한인지 여부는, 권한을 정하지 않은 경우의 대표권의 범위을 기준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범위를 넘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정함이 있어야 하듯이, 그 범위 내의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별도의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전자는 확장, 후자는 제한이 되는 것이죠.
5. 민법 제60조의 제3자의 범위
상법상 지배권·대표권은 정형성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한은 아예 등기를 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상법상 지배권·대표권의 제한을 등기로 공시할 수 없다면, 제3자에 대한 관계에서는 법령에 정해진 대로 지배권·대표권이 있고, 내부적 제한의 대외적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제한 내용을 이미 알고 거래한 사람에 대해서까지 대외적 효력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상법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3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은 비정형적이고, 그 제한은 등기사항입니다(민법 제49조 제2항 제9호). 그 의미는 민법에서는 대표권의 제한도 종국적으로는 대표권의 범위를 결정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효력이 발생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죠. 상법에서는 이미 법으로 지배권·대표권의 범위를 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한이 처음부터 내부적 효력만 있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대외적 효력발생을 전제로 하는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 제한은 등기를 통해 대외적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민법 제60조의 법문상 '대항요건', '대항하지 못한다'라고 표현되어 있어 대외적 효력이 이미 발생하였음을 전제로 대항력만을 규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등기하여야 대외적 효력이 발생한다고 할 것입니다. 아래 판례도 이러한 견해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민법상의 사단법인에 있어서는 비록 그 재산이 중요하고 유일한 것이라 하여도 그 처분에 있어 반드시 사원총회의 결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법인의 정관에 그와 같은 취지의 기재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내부관계에서 효력을 가지는데 불과하며 대외적 관계에 있어 정관에 정한 절차를 밟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그 효력에 소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정관에 재산의 표시가 있는 경우에는 그 재산의 처분은 정관의 변경이 되므로 정관 변경절차에 의하여야 하고 주무관청의 허가가 있어야 할 것이나 피고법인 정관인 을제4호증에는 본건 재산의 표시가 없다) 4
결국 재산의 처분에 총회의 결의가 있어야 유효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주장하려면 법인대표자의 대표권을 제한하여 총회의 결의를 필요로 하는 취지의 대표권 제한을 등기하므로써만 가능할 것(대법원 1975. 4. 22. 선고 74다410 판결).
따라서 등기가 되어 있다면 제3자가 대표권 제한 내용을 알든 모르든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대표권이 인정됩니다. 반대로 등기가 되어 있지 않다면 대표권 제한의 대외적 효력이 아예 없게 되겠죠. 따라서 대표권 제한을 알고 있는 제3자에 대해서도 등기하지 않으면 대표권 제한의 효력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6. 결론
1)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은 비정형적이다.
2)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은 정관 또는 사단법인에서는 사원총회의 의결로 정한다(민법 제59조 제1항 단서). 정관 또는 사원총회의 의결로 대표권을 정하지 않은 때에는 권한을 정하지 않은 대리인의 대리권의 범위에 관한 민법 제118조가 준용된다(민법 제59조 제2항). 따라서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을 정하지 않은 때에는 통상의 사무를 벗어나 법인의 現狀을 변경하는 행위나 법인의 존속을 전제로 하지 않는 행위는 할 수 없다.
3) 민법 제59조 제1항 단서의 정관 또는 사원총회의 의결로 정한 대표권의 범위가, 대표권을 정하지 않았을 때 인정되는 대표권의 범위보다 좁을 때 "이사의 대표권의 제한"이 있다. 이때는 민법 제41조, 제60조가 적용되어 정관에 기재하여야 대내적 효력이 있고, 등기하여야 대외적 효력이 있다.
4) 민법 제59조 제1항 단서의 정관 또는 사원총회의 의결로 정한 대표권의 범위가 대표권을 정하지 않았을 때 인정되는 대표권의 범위보다 넓을 때는 이사의 대표권을 확장하여 정한 것이므로 민법 제41조, 제60조의 적용이 없다. 따라서 정관에 기재하지 않아도 효력이 있고 등기하지 않더라도 제3자에게도 효력이 미친다.
5)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 제한에 있어 등기는 대외적 효력의 발생요건이다.
이상은 민법상 이사의 대표권 제한에 대한 본인의 소박한 의견입니다. 향후 본인이 더 연구하고, 다른 사람의 비판을 통해 변경될 수도 있으므로,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는 이러한 생각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읽으면 됩니다.
Das Ende
참고문헌
양창수. "法人 理事의 代表權 制限에 관한 若干의 問題" 민법연구 제1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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